두샘의 덕수궁 투어 8 뒷걸음질 치는 대한문과 금천과 하마비

김보희 | 기사입력 2021/06/15 [19:25]

두샘의 덕수궁 투어 8 뒷걸음질 치는 대한문과 금천과 하마비

김보희 | 입력 : 2021/06/15 [19:25]

 


L-3 뒷걸음질 치는 대한문(大漢門)

 

 대한문 일원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대한문이 아니라 남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단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올 때도 당시에 남문이었던 인화문을 통해 들어왔다. 경운궁은 정문인 남문을 인화문, 동문은 대안문, 북문으로 영성문을 각각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정문인 인화문은 주위에 민가가 많아 출입이 불편했다. 그리고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1900년경 인화문은 건극문으로 이름을 바꾸고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덕수궁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인데, 황성신문독립신문의 기록으로 보아 1898년경부터 지은 것으로 파악된다. 대한문은 1970년 이전에 적어도 3, 많게는 10여 차례 옮겨졌단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대안문은 불타지 않았지만, 보수하면서 1906년에 문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서울의 축이 광화문에서 숭례문(남대문)으로 이어진 1900년대 초 태평로가 뚫려 대안문이 주로 이용하는 출입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화문은 앞에 물길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길 자체도 좁아 정문으로 사용하기 불편해 동쪽의 대안문을 정문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 덕수궁의 과거와 현재(1890년대~현재)|작성자 현대사스토리텔러  

 

뒷걸음질 치다가 소가 쥐를 잡는다

덕 본다는 속담인데 소를 어찌 뒤로 몰까

텅텅 빈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배 터지는 덕수궁  

 

L-4 대한문은 최소 3번 뒤로 옮겨져

 

중화전과 중화문을 새로 짓고 인화문을 철거하고 이어서 외삼문(外三門)으로 조원문을 건설해서 법전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인화문의 현판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단다. 인화문의 자리에는 건극문을 세우고 조원문 앞 동쪽에 새로운 정문으로 대안문을 재건했다. 또한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여러 방향의 도로가 건설되고 환구단(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건립되면서 경복궁의 동십자각처럼 도심에 고립되었다.

 

1914년 덕수궁과 현 서울시청 사이에 큰길인 태평로가 만들어지면서 도로 확장에 따라 대한문이 궁 안쪽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명확한 이전 기록은 1926년에 나온단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덕수궁 앞 일부 땅을 매각하면서 대한문을 원래 위치에서 뒤로 옮겼다. 1961년 태평로 도로 폭이 6m 확장됐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옮겨졌다. 당시 덕수궁 돌담을 해체하고 철책으로 둘렀는데 시청 앞에서 보면 덕수궁이 훤하게 보였다. 후에 철책을 철거하고 성벽을 복원해서 현재는 전체가 돌담이다.

 

1970년 태평로 확장으로 인하여 당시 위치에서 33m(덕수궁 안내책엔 33m이고 다른 자료에는 22m라는 기록이 많음) 가량 뒤로 물려서 현재 위치에 있게 됐단다. 안으로 옮길 때는 대한문을 밀어서 옮겨 화제가 되었단다. 대안문을 뒤로 옮기는 건 목수들이 했겠지만, 드잡이 김천석 장인이 무거운 기와를 다 내려놓고 동아줄로 꽁꽁 묶은 다음 뒤에서 문 자체를 잡아당기자 문이 슬슬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단다. 무려 14m를 이동했단다.

 

 현재 서울시청광장에 있던 대안문은 수차례 이전을 거듭했다.


1904년 경운궁(慶運宮) 대 화재 이후 1906715일 재건되면서 고종의 명령으로 수리와 함께 대안문(大安門 :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대한문(大漢門 : 한양이 창대해진다.)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나라 으로 바꾼 게 아니라 대한(大漢)은 큰 하늘 즉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을 품고 있단다. 차라리 大韓이면 더 좋았을 텐데. 원래 대한문이 서있던 자리는 지금 시청 앞 광장이었단다.  

 

 대한문 앞에서 서울시청 모습

   

L-5 대한문(大漢門) 앞 서수

 

 대한문을 들어서면 삼문 가운데, 즉 황제가 다니던 중앙의 기둥 앞에 난데없는 서수가 양쪽에 있다. 허접한 철재 보호물로 서수를 보호하는 걸까? 낮은 울타리에도 뛰쳐나가지 못하는 걸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서수 보호 울타리 색깔도 변했구나.

 

 대한문 천장

 

 대한문

  

대한문 옛날 사진을 보면 3단의 월대가 놓여있고 중앙에 답도가 있는데 해태상을 조각한 서수도 양쪽에 있다. 덕수궁의 정문으로 신분이 바뀐 대한문은 답도가 놓여 있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계단과 소맷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 같다. 돌계단은 아예 아스팔트에 묻혀버렸다는 말도 있다. 본래의 위치와 자세를 잃어버린 서수(瑞獸)에서 어색함이 느껴진다.  

 

 

 

대한문의 위치나 월대 등은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렵지만, 옛날 답도의 모습을 되살리고 있다.   

 

L-6 금천과 하마비

 

 대한문 안쪽 어도가 있는 금천교 건너편 좌측에 하마비 상단이 보인다.

 

금천교는 궁궐의 신성한 영역을 외부와 구분 짓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은 왕을 찾아뵙기 위해 입궁한 신하는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어 충의 의미를 되새기고 다리를 건너 궐 밖으로 나가는 임금 또한 흐르는 물에 마음의 씻어 백성들을 어여삐 보라는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궁궐이나 정문을 통과하면 금천교(禁川橋)가 있었다. 경복궁은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은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라 부른다. 덕수궁과 경희궁도 금천교라 불렸다. 경운궁은 남쪽으로 흐르는 정릉 동천의 물길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금천교를 만들었고, 이 물길은 다시 궁 밖으로 흘러가 현재의 서울 광장을 가로질러 청계천으로 합류되었다. (덕수궁과 경운궁 혼용, 1907년 순종 즉위부터 덕수궁 사용)

 

 현재의 금천교는 1986년 발굴로 복원된 것이란다. 원래 경운궁 시절 금천이 이러했는지 아니면 발굴하다 중지했는지. ()도 아닌 골프장의 벙커 같다.


덕수궁 금천교, 홍예도 거의 다 매몰되었다.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이 없어 반쪽짜리 복원이라 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래 이렇게 낮았었나? 왜 다른 금천처럼 깊이와 바닥을 드러내지 못하는가? 자세히 보면 물에서 나온 기운을 막을 거북, 해치 등의 작은 조각상도 보이지 않는다.

 

덕수궁의 대한문을 들어서면 10m도 못 가서 마주치는 돌다리가 금천교인데 민망하다. 대한문과 거의 붙어있어 금천교라는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다. 금천은 풍수지리에 의한 배산임수의 성격과 궁궐의 안과 밖의 경계로 입궐하는 신하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잡는 의미도 있는데, 먼지라도 털 여유가 없다. 실은 현재의 금천교는 경운궁 건설 당시의 금천교가 아니다.

 

경운궁은 두 개의 정전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궁과는 달리 두 개의 금천을 가진 궁궐이었다. 4번째 이야기에서 중화전이 정전이기 이전에 현재 정4품 품계석 옆에 배수 구멍이 즉조당이 정전일 때 금천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것도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확인하나?

 

 하마비, 지금이라도 궁 밖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금천교와 대한문이 거의 붙어있는 이유는 대한문이 도로 확장 등으로 계속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공간도 문제지만 물길도 막혀있다. 홍예도 반쯤 모래로 덮었고 궁궐 금천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수도 하나 없다. 또 하나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힌 하마비가 궁궐 밖에서 쫓겨들어왔다. 궁궐 안에 유일한 하마비를 자랑해야 하나? 말을 타고 대궐 정문을 거리낌 없이 들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래도 금천교를 건너기 전이라 다행이다.  

 

L-7 덕수궁 수문장 교대의식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 박래현, 삼중통역자> 관람을 보고 막 나오는데 석조전 뒤편에서 풍악에 맞추어 수문장들이 교대식에 참가하기 위해 멋들어진 행렬이 보였다. 1056분이니까 11시 정각에 시작하는 교대식이다. 외국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지만 코로나로 대부분 우리 국민이었다. 수문장들은 자세와 표정이 흐트러짐 없이 교대식을 진행하는 프로들이었다. 복장이 매우 아름다웠고 재현이 잘된 행사로 보였다. 대략 20여 명으로 된 취주악대는 훌륭한 풍악을 연주하면서 관광객들을 사로잡았다.  

 

10여 분 동안 의식이 펼쳐지는데 모습이 매우 절도 있고 위엄있으며 그들의 구호 소리도 매우 우렁찼다. 덕수궁 수문장들은 시청에 소속된 직원들이라는데 키는 평균 175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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