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샘의 덕수궁 탐방 7 어리둥절한 양탕국에 난감한 정관헌과 대한문

김보희 | 기사입력 2021/06/08 [14:33]

두샘의 덕수궁 탐방 7 어리둥절한 양탕국에 난감한 정관헌과 대한문

김보희 | 입력 : 2021/06/08 [14:33]

 


K-1 정관헌 

 

 정관헌

  

덕수궁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궐내각사가 있었던 예쁜 연못과 정원을 지나면 정관헌이 나온다. 함녕전의 북쪽에 조금 떨어져 있어 다행히 1904년 화재 때 피해를 보지 않았단다

 

 정관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인 1897년 중화전을 비롯하여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등 많은 건물이 연달아 세워질 때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가인 세레딘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한 건축물이다. 사바틴은 1897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경복궁에 머물던 중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몇 채의 서양식 건물을 궁내에 지었는데, 정관헌도 그때(1897~1900) 건립된 초기 서양식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 외에도 덕수궁 중명전과 석조전, 서대문의 독립문과 정동 러시아 공사관 등을 설계했는데, 이는 고종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정관헌 측면


이 전각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특이하게 궁궐 지붕형태인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3단 기단 위에 건물이 올라가 있는 것으로 봐서 우리의 궁궐 전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통적이지는 않고 오히려 서양 건축양식과 조화를 이룬 깔끔하면서도 단순한 구조다.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다. 건물이 이국적으로 보이는 것은 처마가 없고 베란다 바깥의 서양식 기둥, 난간의 화려한 색채와 벽돌 때문이다. 외곽의 로마네스크 풍의 기둥은 이 건물이 서양식 건축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지붕이 서양에서 쓰지 않는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전면과 양측면에 베란다가 있다. 베란다의 존재로 보면 정관헌은 동남아시아에 지어진 식민지풍의 건축 형식이지만 지붕이나 세부 장식에는 한국적인 요소가 많단다.

 

 정관헌 용문양 

 

 정관헌 정면 가운데 출입구 아치 위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문양이 투각 되어있어 이곳으로 황제가 출입했음을 알 수 있다.


190010월에 발생한 경운궁 선원전(璿源殿)의 화재로 태조의 영정을 비롯해 역대 왕들의 어진이 모두 불에 탔다. 그래서 새로운 어진을 모사하였는데 태조는 함흥의 준원전(濬源殿)에 모셔졌던 것을 갖고와 모사하고 함흥으로 곧장 되돌려졌다. 또한 1906년 고종의 어진(御眞)과 순종의 예진을 잠시 정관헌에 봉안하였다가 1912년에 흠문각으로 이봉했다.

 

한편 정관헌은 고종의 연유처(宴遊處)로 외빈을 초대해 연회를 열거나 고종황제가 다과를 들며 음악을 감상하던 휴식처로 사용하기도 했나 보다.

 

"[문화재등록 제82, 등록사유(200426일자)] 덕수궁 안에 있는 정관헌은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가 다과 등 휴게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회랑 건축물(1900)로 궁에 위치한 근대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정관헌은 다양한 건축양식과 건축재료로 지어진 건축물로 궁궐에 서양 신문화의 이입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정관헌은 대부분 기간을 어진(御眞)과 예진(睿眞)을 봉안하거나 어진을 모사하던 공간으로 사용된 것만 확인할 수 있단다.

 

 정관헌 앞에서 바라본 내부

 

 정관헌 좌측에서 바라본 내부와 천장에 매달린 저 샹들리에 불빛도 그 당시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세상을 밝혀주는 전기가 너무도 신기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베란다 무늬에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소나무와 사슴이 새겨져 있고 난간 기둥에는 복과 다산을 상징하는 박쥐가 있다. 전통미술에 박쥐가 가끔 새겨져 있는데 더욱 아름다운 건 정관헌의 테라스다. 금색으로 표현된 이곳 테라스 난간에는 소나무 아래 사슴, 박쥐, 불로초, 방승 무늬 등 길상 문양들이 보인다. 갖가지 장수를 기원하는 문양을 새겨놓으면서 황제의 안위와 건강을 비는 마음도 잘 표현하고 있다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정관헌은 고종의 커피 타임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개방형으로 되어있어 흡사 야외 카페를 연상시키는 이곳이 바로 고종황제가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며 좋아하던 커피와 다과를 즐겨 먹었던 곳이다. 흔히 가배 또는 양탕국이라 불리던 커피는 아관파천 당시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맛을 본 후 즐겼다고 하는데, 내전의 후원 정자 기능을 대신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고종황제의 애창곡은 '몽금포 타령' 이었고 '차이코프스키의 행진곡'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고종황제는 클래식과 우리나라 전통민요를 섭렵하면서 들었던 음악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정관헌에 관한 문헌자료를 통틀어 이곳이 '커피나 마시는' 휴식공간이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설명이 이래요? 항의해도 할 말이 없다. 독자들의 관심과 조언을 기대한다. 정관헌(靜觀軒), 이름 그대로 덕수궁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때 덕수궁을 찾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차와 음료를 판매하는 카페로 정관헌이 운영되기도 했단다.  

 

고종이 마셨다던 양탕국이 무엇일까

지금도 대한문 앞 카페에선 주요 메뉴

한 그릇

가을 호수를 만든다

향긋한 단풍 냄새

 

 20201030일 조각전시회가 덕수궁 일원에서 열렸는데 주제는 토끼 방향 오브젝트였다. 대한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있는 호수에서 작품들이 물속에도, 섬에도, 땅에도 널려있었다. 커피향과 단풍향, 토끼향이 뒤섞여 한 판 노는데 파란 하늘도 어느새 내려와 두둥실이다.


K-2 고종과 순종의 커피 독살 미수 사건?

 

이러한 커피 애호는 결국 고종의 독살 미수 사건을 낳게 된다. 1898년 고종과 황태자인 순종이 즐기던 커피에서 다량의 아편이 검출된 사건이 발각되었다. 고종황제는 다행히 커피 맛에 이상을 느끼셔서 바로 뱉었으나 황태자인 순종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들이마시는 바람에 치아가 모두 빠지고 며칠간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고 전한다.

 

이 사건의 범인은 러시아 통역관인 김홍륙이 저지른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그의 유일한 세력 기반이 고종이었던 것과 유배 중에도 지속적으로 고종의 안위를 걱정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정적들이 누명을 씌워 그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K-3 고종의 독살설

 

일제는 1919121일 고종이 중병으로 붕어했다고 발표했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이 황실의 식자재를 담당했던 한상학을 사주해 고종이 마시는 식혜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와 같은 태황제 고종의 붕어는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자손들이 임종도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순종황제는 창덕궁에 있었는데 새벽에 전화를 받고 경운궁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태황제는 숨을 거둔 후였다. 태황제 고종이 붕어할 당일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이 바로 이완용과 이기용이었다. 일제는 고종의 붕어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비공식적 방법으로 알렸는데 사인은 뇌일혈이었다고 발표했다.

 

고종황제의 시신을 직접 본 민영달(명성황후 사촌 동생)과 한진창(중추원 참의)이 전한 말을 윤치호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 후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사후 이틀 만에 시신이 크게 부어올라 옷을 찢어 벗겨 냈으며 이가 모두 빠져있고 혀가 닳아 없어졌으며 시신의 목에서부터 복부까지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고종의 붕어는 온 세상을 도탄에 빠뜨렸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슬픔에 빠진 백성들이 대한문 앞으로 몰려들어 애도의 물결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31 만세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L-1 대한문(大漢門)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경복궁을 시작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녀왔고 이제 덕수궁 탐방을 진행하고 있다. 궁궐을 탐방할 때 정문부터 답사를 시작하였는데, 지금까지 정문은 모두 화()자 돌림이었다. 경복궁은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남향이 아닌 동()향인 창경궁도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런데 덕수궁은 대한문(大漢門)이다. 이전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다. 참고로 다음에 가볼 예정인 경희궁도 흥화문(興化門)이다.

 

 


L-2 갈팡질팡 덕수궁 역사 아직도 꿈결

 

덕수궁을 쓰면서 꾀가 난달까 머릿속이 복잡하여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발표할 시간에 쫓기어 석어당부터 시작했다. 선조때 정릉동 행궁에서 경운궁까지 발달은 하였지만 인조는 1623년 석어당과 즉조당 이외는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사실상 두 건물 외에는 백성들이 살던 곳인데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돌아오던 1897년 갑자기 경운궁으로 궁궐 공사가 시작되었다. 국호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정전도 즉조당에서 중화전으로 바뀌고, 정문도 인화문에서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아직 덕수궁의 금천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도심이 바뀌며 새로 생기는 길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궁궐을 토막 내듯 자르고 정문을 찔끔찔끔 후퇴시키며 섬을 만들다가 뒤로 끌어당긴다. 금천은 조롱거리가 되었고 하마비는 정문조차 뚫고 들어왔다. 여기저기 들어서는 서양식 건물은 백성의 눈을 뒤집어 놓는다. 불과 3년전 덕수궁 돌담길을 복원하여 돌아볼 수 있다고 하여 확인 차 골목길로 들어섰더니 곧바로 영국대사관에 막혀 에셔의 그림으로 들어가 성벽을 타고넘어 덕수궁으로 들어갔다가 성문으로 당당히 나왔다. 중명전은 아직도 섬나라로 떠돈다. 언제쯤 덕수궁 품에 안길까? 부끄럽다.   

 

덕수궁을 들어서면

선조 시절 되돌아가

문제란 문제 다 끄집어 내

싸움질로 한밤중

아직도

부관참시 하느라

발만 동동

왜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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