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2. 큰 복을 받으려다 한 줌 잿더미로 주저앉다

김보희 | 기사입력 2020/07/22 [18:45]

안희두 경복궁 탐방기 2. 큰 복을 받으려다 한 줌 잿더미로 주저앉다

김보희 | 입력 : 2020/07/22 [18:45]

 

 


C. 경복궁 창건

 

C-1 창건

1392717일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개국하였다. 도읍지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기로 하여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경복궁 창건을 시작하였다. 북으로 북악산에 기대어 자리 잡았다. 정문인 광화문 앞에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도시계획의 중심지로 이듬해인 1395(태조 4)1228일 새 궁궐에 입주했다. 즉위 35개월만이다.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 : 비나 눈을 맞지 않게 하려고 배려한 시설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 연생전(延生殿) 3, 경성전(慶成殿) 3, 왕의 평상시 근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 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사직공원 쪽에서 인왕산 등산(202057)


글을 쓰면서 보니 경복궁의 모습은 정교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가 아닌 백성들이 즐겨 쓰는 투박한 항아리 모습이었다. 가운데 붉은 선을 기준으로 항아리를 돌려봐라.  

 

 경복궁 일원 다음 지도


광화문에서 시작된 중심축은 흥례문, 근정전, 사정전의 외조 지역을 지나 강녕전, 교태전의 내전까지 길게 이어진다. 교태전 아미산을 넘어서도 그 축은 이어져서 복원 중인 흥복전, 함화당 등의 빈궁 지역까지 이어져 마침내 향원정에 이른다. 다만 일직선으로 솟아오르던 대칭축은 아미산에서 꺾인다. 향원정과 건청궁에서 동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물론 광화문에서 세종로로 내려오면 중심축은 서울시청 앞까지 연결된다. 로마의 바티칸시국이 떠오르며(수원인터넷뉴스 2020/03/18 http://swinews.com/97230) 이곳은 조선왕조의 번창을 위한 랜드마크이며 나아가 한반도의 미래를 여는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광화문 광장의 재구조화에 미래를 위한 심도 있는 의견을 모아 한반도의 백미가 되길 바란다.  

 

 문경전 터 앞의 안내판에 북궐도형


C-2 정종과 태종의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으로 크기는 가로 500m, 세로가 700m이다. 중국 자금성은 가로가 760m, 세로가 960m이고, 교토 일본 황궁은 가로가 250m, 세로가 450m이니 제법 큰 편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5(태조 4) 한양에 390여 칸의 경복궁과 종묘와 사직단을 짓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열흘 후 정종은 조선의 제2대 임금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그리고 도읍지를 다시 개성으로 옮겨 경복궁을 비우게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제3대 태종이 즉위했고, 태조의 뜻을 받들어 경복궁을 창건한지 불과 10년만인 1405(태종 5) 이궁(離宮 : 정궁에서 떠나, 일시적으로 왕이 기거하는 궁궐.)으로 창덕궁(昌德宮)을 짓고 한양으로 환도하였다. 현재의 서울, 한양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조선 태조의 집념과 두 번의 천도로 조선의 도읍지가 되었다.

 

 계조당 복원 가림막에서 도성도


C-3 경복궁 위엄

1398(태조 7) 경복궁 궁궐 담장이 완공됐고 세종 때 궁궐의 위엄을 갖추었다. 1418년 수강궁 창건(세종 즉위), 1427(세종 9)에 동궁(자선당), 1438(세종 20)에 흠경각 및 선원전, 그리고 1443(세종 25)에 교태전 등을 건립했다.

 

세종·문종·단종은 주로 경복궁에 기거했으나, 세조는 경복궁을 꺼려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경복궁은 임금이 살지 않는 정궁(正宮)이 되었다.

 

 궁궐임을 증명하는 동십자각


경복궁은 세종 때 크게 중창하여 궁궐의 위엄을 갖추었다. 그러나 1543(중종 38) 동궁 화재와 1553(명종 8) 9월에 강녕전에 큰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일대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강녕전, 흠경각 등 모두 복구하였다.   

 

D. 임진왜란

 

D-1 불타는 대궐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파죽지세의 왜군이 한양으로 들이닥치자 선조는 430일 새벽 창덕궁의 인정전을 나와 도성을 버리고 서둘러 의주로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에 난입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했으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을 방화했다. 일반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 누가 불을 놓았는지 알 수 없으나, 불이 난 장소는 남대문 안 큰 창고라고 했지 궁궐은 아니었다.

 

 1825년 김정호가 직접 완성한 서울 시가지도이다. 20098월 청계천 벽면 촬영


일본측 전쟁기록에는 159253, 왜군(倭軍) 1번대가 동대문을 통해 들어왔고, 54일 제2번대가 숭례문(남대문)으로 들어왔다. 1번대의 54일 기록은 이곳이 용()의 세계인지 신선(神仙)의 세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라고 극찬했는데, 2번대는 57일 일기에서는 궁궐(宮闕)에 들어가니 모두 폐허로 변해 있었다.”라고 적혀있단다. 54일에서 7일 사이에 궁궐에 불이 나고 전체가 소실되었다.(http://blog.naver.com/jungyoupkim/220927138184)

 

온 나라를 초토화(焦土化)한 왜구가 우리의 멋진 궁궐을 구경만 하고 감탄만 했을까? 왜장 평수가(平秀家)는 부하를 이끌고 종묘(宗廟)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왜구는 종묘를 불을 질렀다고 한다.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성계와 정도전이 경복궁에서 꾼 꿈은 한 줌 잿더미로 주저앉았다.

 

D-2 창덕궁과 창경궁 복구

1593(선조 26)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의 저택(현재 덕수궁)을 임시 궁궐로 삼고,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선조는 경복궁은 폐허인 채로 그냥 두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1613년 복구하기 시작해 광해군 때인 1616년에 끝냈다.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경복궁을 복구하지 못한 이유는 규모가 커서 재료와 인력을 동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북관대첩비  

 

전국토가 왜놈들로 촛불 앞에 조선을

의병으로 혁혁한 공 난세를 구한 영웅

주리 튼 누명을 씌워 옥사로 마감한 생

 

85년 지나 누명 벗고 주민들이 세운 비석

200년 묻혔다가 야스쿠니 보초라니?

뜨겁던 환영식 후엔 경복궁에 패대기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함경북도 북평사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중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퇴한 공을 기려 조선 숙종 때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운 전공 기념 비석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1905년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전리품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51117일 을사늑약 100주년에 경복궁에 제막하였다. 진품은 200631일 개성을 거쳐 북한으로 인도되었고, 경복궁 유화문 서쪽 잔디밭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위키백과 발췌)

 

그보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태종도 거주하기 싫어한 왕가 골육상잔의 현장이라는 점, 표면상 선위를 받은 세조도 경복궁을 꺼려 창덕궁에 머물렀다. 경복궁은 이제 정도전이 말한 '큰 복을 누려 번영할 명당'은 아니라는 점, 백악산·인왕산에서 들여다보여 왕비와 대비 같은 여성이 은밀하게 거처하는 공간으로 부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다행인 것은 경복궁의 궁성은 임진왜란으로 궁궐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에도 일반 백성들로부터 궁궐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의 궁성은 그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것이고, 일부는 본래 위치보다 안으로 들여 쌓은 상태이다.

 

 서십자각 터 표식대로 20164월 설치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쪽문 근처에 도로가 꺾여지는 곳에 있다. 동십자각이나 서십자각은 원래 궁궐과 연결된 궐대이다.


D-3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경복궁은 1592년 불탄 후 270여 년 동안 복구되지 않다가 1865(고종 2) 흥선대원군(이하응 李昰應, 1820~1898)에 의해 중건을 시작해 1872(고종 9)까지 7년에 걸친 대공사를 강행하여 500여 동의 웅장한 대규모 궁전으로 중건했다. 1868년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여러 차례의 화재와 복구가 거듭되었다.

 

 세종대왕 동상(옛날 육조거리, 광화문 광장)


경복궁 복원 공사가 착수할 무렵인 4월은 농번기가 시작된다. 그런데도 35,000여 명을 동원했고, 무리한 공사비 마련으로 민심이 악화되었다. 경복궁은 착공 3년 만인 1868년 완공되었으나 부속 건물 공사는 1872년까지 이어졌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13892평 면적에 7,225칸에 달했다. 태조 때 1차 완공된 경복궁이 390여 칸이고,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8,000여 칸임을 생각하면 대원군은 얼마나 무리한 역사를 만들었나 느낄 수 있다.

  

 광화문 앞의 해치상

 

세상이 급변하는 경복궁 복원은 꼭 필요했던가? 세상이 그렇게 여유롭게 돌아갈 때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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