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칠궁 탐방기 -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신주 이야기

김보희 | 기사입력 2020/05/27 [09:14]

안희두 칠궁 탐방기 -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의 신주 이야기

김보희 | 입력 : 2020/05/27 [09:14]

 


[뉴스투나잇] 칠궁에 대한 기억은 없다. 경복궁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료를 찾다가 <칠궁 특별관람 예약> 코너가 있어 클릭해보았다. 칠궁은 조선시대 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개인은 현장접수를 하는데, 경복궁 북쪽 무궁화동산 안내 부스에서 신분증 제시 후 신청서를 작성한다. 서울 궁궐 탐방편에서 칠궁을 먼저 소개하는데, 궁궐이란 의미가 아니라 종묘의 추존왕 연장선이라 생각해 주기 바란다.

 

 청음 김상헌의 시비, 그의 집터도 가까이 있었나 보다.


424830분경 효자동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방향을 잡는데 경찰이 다가온다. 칠궁에 간다고 했더니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무전기로 우리의 동선을 동료들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청와대 경비원들과 불필요한 접촉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 같았다. 첫 입장이 920분에 시작이니 50여 분이 남기에 무궁화동산을 3바퀴 정도 돈 것 같다.  

 

 청와대 앞 분수대로 198511월 설치하였다.


칠궁은 청와대 옆에 바로 붙어 있다. 1968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 강화를 위해 관람이 금지되었다가 50년만인 2018년 시범 개방을 거쳐 이젠 정기적으로 입장 시간을 정해서 관람할 수 있게 바뀌었다

 

 팜플렛 안내도


왕의 어머니가 된 후궁들은 종묘에 들어갈 수 없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를 위해 1725(영조1)에 이곳에 사당을 짓고 숙빈묘라 했다. 이후 1744(영조20)에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의 육상(毓祥)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1753(영조29)에 궁으로 승격하여 육상궁이 되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200회 넘게 이곳을 방문했는데, 어머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효심이리라. 또한 영조는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 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고 한다

 

 우측에 보이는 한옥이 바로 칠궁이다.


꿈인 성은(聖恩) 입었지만

질투의 시작이다

세손을 낳았어도

독이 될지 누가 알까

기필코 모친의 야성은

용상 위에 올렸다.

 

 칠궁 정문인 외삼문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육상궁 외에도 왕을 낳은 후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 여럿 있었다. 고종과 순종 때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연호궁의 신주를 이곳으로 옮겼고, 1929년에 덕안궁을 옮겨와서 육상궁에 일곱 분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좌측이 저경궁, 우측이 대빈궁이다. 다른 궁들의 기둥은 사각형인데 비해 유일하게 대빈궁만 원기둥이고 계단도 한 칸 더 많으며 사당문의 장식도 화려하다.

 

저경궁은 추존왕인 원종의 어머니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1743(영조19) 인빈 김씨의 사당을 원종의 옛집이었던 송현방에 마련하였다. 이후 종실인 이증의 집으로 옮겨 모셨다가 1755(영조31)에 다시 송현방으로 옮기면서 저경궁이라 개칭했다.

 

 경우궁과 선희궁


가운데 건물은 대빈궁으로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궁녀에서 정실 왕비까지 올라갔지만 사약을 받고 죽은 희빈 장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경종은 1722(경종2)에 희빈 장씨의 사당(경행방)을 교동에 건립하였고, 1870(고종7)에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이후 1887(고종24)에 원래대로 경행방으로 옮겼다가, 1908년에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외국인들에게 칠궁에서 가장 기가 센 곳으로 소문나 이곳에만 머물다 가는 사람들도 많단다.  

 

 두 궁이 합사되어 선희궁 현판이 경우궁 뒤에 있다.


육상궁이 연호궁과 함께 사당을 쓰는 것처럼 한 건물에 경우궁과 선희궁의 두 신위가 모셔져 있다. 경우궁은 순조의 어머니이며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824(순조24)에 양덕방 계동에 사당을 세워 경우궁이라 하였고, 이듬해 신주를 모셨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이 이곳에 모셔놓고, 1886년에 인왕동으로 옮겨 지었다. 1908년에 신주를 육상궁 안으로 다시 옮겨서 현재는 선희궁과 한 건물에 있다.

 

선희궁은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이며,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1765(영조41)에 순화방에 사당을 세우고 의열묘라 하였다. 정조는 1788(정조12)에 묘호를 선희궁으로 개칭하였고, 1870년에 육상궁 안으로 모셨다가 1897(고종34)에 원래 있던 순화방으로 옮겼다. 1908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서 현재는 경우궁과 같은 건물에 있다. 한 건물에 있는 관계로 현판도 경우궁 안쪽에 선희궁이라는 현판이 있다.

 

 연호궁 전경


연호궁은 추존왕 진종의 어머니이며,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사당이다. 정조는 영조의 명에 따라 효장세자의 뒤를 계승하여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1778(정조2) 정빈 이씨의 사당을 북부 순화방에 세웠다. 연호궁은 1870년에 육상궁 안의 별묘로 옮겼는데, 지금 모습처럼 한 건물 안에 숙빈 최씨와 합사된 내력은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경우궁과 선희궁처럼 한 건물에 두 개의 사당이 있어서 현판도 연호궁 현판 안쪽에 육상궁 현판이 따로 있다.  

 

 연호궁 현판 안에 육상궁 현판


덕안궁은 영친왕의 어머니이며, 고종의 후궁인 순헌 귀비 엄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덕수궁) 안에 엄씨가 거처할 곳을 짓고 경선궁이라 하였다가, 1911년 엄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덕안궁으로 개칭하였다. 1913년 태평로에 사당을 지어 모시다가 1929년에 육상궁 안으로 모셨다

 

 덕안궁


칠궁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당을 어떻게 짓고 운영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칠궁의 입구인 외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가면 송죽재(한때 영조의 어진을 모셨던 곳)와 풍월헌이 있는데, 칠궁의 제례를 준비하던 재실이다. 그 뒤편 건물에는 삼락당이 있다. 영조는 육상궁에 거동하며 예를 올린 후에 삼락당과 풍월헌에서 신하를 접견했다고 한다. 1772(영조48)에 육상궁에 예를 올리고 시보책을 풍월헌에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단다.

 

 송죽재와 풍월현


중문을 지나 육상궁과 연호궁으로 들어가는 삼문을 들어서면 신주를 임시로 모시던 이안청이 육상궁과 연호궁 앞 동서로 대칭되게 있다

 

 삼문이다. 가운데 문 안으로 보이는 건물이 <연호궁>


<연호궁> 안쪽에 <육상궁> 현판이 붙어있다. 원래 있던 육상궁과 연호궁을 합친 것으로 숙빈 최씨가 어른이기 때문에 현판이 안쪽에 자리했다고 한다. 숙빈 최씨와 정빈 이씨는 고부지간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혼백이 같은 곳에 있는 셈이다. 저세상에서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있으니 좋을까? 걱정도 된다

 

 내부 안내도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초가정 하나가 있고, 그 아래쪽에 우물이 있는데 냉천이라고 한다. 제사 때 냉천의 물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냉천에서 흐르는 물은 수로를 따라 냉천정 앞 연못으로 흘러든다

 

 냉천정은 영조가 어머니의 제사를 준비하며 휴식을 취하던 장소다. 한때 영조의 어진이 보관된 곳이다.


냉천 북쪽 석축에는 영조가 냉천과 냉천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냉천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모인 네모난 연못을 자연이라고 한다. 화강암의 장대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남쪽에 자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쪽에 냉천

 

 냉천에서 흘러내린 물은 네모난 연못으로 흘러들어가는데 연못의 이름은 '자연' 이다.

 

 내삼문


또 다른 사당으로 들어가는 삼문이다. 이곳에는 5(왼쪽부터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경우궁, 덕안궁)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앞서 말했듯이 가운데 장희빈의 사당이 다른 곳과 약간 다르다. 기둥이 원형이며 계단이 한칸 더 많고 그리고 창호가 아래쪽에 다른 곳보다 높이 있는 등 조금 더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내부 안내도

 

참고로 매년 10월 네째 주 월요일에 칠궁제를 지낸다고 한다.

 

 출입구인 내삼문


위 자료는 칠궁 안내자료를 전재로 작성하였다.

 

조선에서 왕이었고 어엿한 왕비였음에도 종묘와 칠궁에서도 제외된 분이 있다. 연산군(재위 1494~1506)19세에 조선 제10대 왕이 되었으나 겨우 31세에 신하들에게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죽음 이후 그의 식솔들 역시 궁에서 쫓겨나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다. 연산군의 묘는 서울시 방학동에 있다.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23)은 아슬아슬하게 1608(34) 15대 왕으로 등극했으나 조카뻘인 인조에게 1623년 쫓겨났다.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와 폐세자빈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해 7, 폐세자 질은 도망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세자빈 박씨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어 부인 유씨는 1624(인조 2)에 병으로 죽었으며, 광해군은 19년의 유배 생활 끝에 1641(인조 19)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

 

궁궐 이야기는 백령도와 대청도 이야기 후에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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